영혼을 본 인간은 아마 없을 것이라는 것이 현재로서의 답이다. 우리는 이름과 나이, 직업, 검색 기록과 구매 기록 같은 정보로 자신이라는 존재를 끊임없이 기술한다. 하지만 그 정보들을 바라보는 ‘지금의 나’ 자체는 어디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 순간이 있다. 직함과 수치는 ‘나’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 준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자기 자신이라고 누가 확신하며 살아가는가.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자신과 마주할 때마다 ‘영혼’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이 말이 무언가를 설명해 주기 때문은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이해가 멈추었을 때 등장하는 말인 것이다.
‘영혼’이라는 말은 ‘영혼의 불멸, 윤회, 정화’처럼 종교적 맥락에서 자주 쓰이며, 고전적인 철학 개념으로 인식되는 듯하다. 이와 비슷한 말로 ‘혼령’이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영혼이 불멸하며 죽은 자가 부활한다고 여겼다. 또 프시케(Psykhe)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이 역시 그리스 철학에서 ‘영혼’을 뜻한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입이나 상처를 통해 프시케가 빠져나와 망령이 되어 저승으로 내려간다고 했다. 이처럼 고대에는 활발하게 등장하던 개념이었지만, 근대 이후에는 ‘마음’이나 ‘주관’으로 초점이 옮겨 갔고, 오늘날 영혼에 관해 이야기하는 일은 드물다. 즉 영혼이라는 말은 설명의 대상이라기보다, 자기를 확정할 수 없다는 사태 자체를 가리키기 위해 계속 쓰여 왔다. 그래서 근대 이후 ‘마음’이나 ‘주관’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되었음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심리학과 신경과학이 발달하고 자기가 정보 처리의 과정으로 설명되게 된 뒤에도,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는 감각 자체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는 논의가 거듭 제기된다.
자기가 이토록 정보로 설명될 수 있는 세계를 극단적으로 그린 작품 중 하나가 『GHOST IN THE SHELL / 공각기동대』다. 작품 초반에는 전뇌에 거짓 기억이 심어져, 존재하지 않는 가족과의 생활을 믿게 된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행복이 아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정합적인 자기상이 주어졌을 뿐이다. 그 자기상이 무너진 순간, 그는 현실이 아니라 자기의 의지처를 잃었다. 이 장면은 흔히 로버트 노직의 경험 기계를 떠올리게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쾌락이냐 현실이냐라는 이분법이 아니다. 자기가 정보로서 일관되기만 하면 인간은 그것을 ‘나’라고 인식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가 질문의 핵심이다. 기억과 자기 삶의 이야기가 일관되면 인간은 그것을 자기로 인식하고, 허구라고 판정할 수 없다. 공각기동대의 세계에서 이런 사태는 예외가 아니다. 기억은 조작할 수 있고, 신체는 교체할 수 있으며, 인격은 데이터로 관리된다. 『GHOST IN THE SHELL / 공각기동대』에서 영혼이란, 자기가 정보만으로 성립하기 때문에 남겨진, 소재를 알 수 없는 위화감이다.
쿠사나기 모토코 역시 예외 없이 자기 자신이 정보만으로 성립한 인물이다. 유일한 생물학적 부분인 대뇌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의체로 이루어져 있다. 신체는 교체할 수 있고, 감각은 전뇌를 통해 처리되며, 기억조차 조작의 대상이 된다. 즉 쿠사나기 모토코는 자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기가 외재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 조건에서는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이 성립하기 어렵다. 확인하려 할 때마다 참조하는 것은 데이터로 기술된 자기상이기 때문이다. 국가와 조직에 의해 관리되고 임무와 지위에 의해 정의되는 그녀의 자기는 관측될 때에만 모습을 갖는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내부에서 확정할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런데도 작품 속에서 자신이 무엇인지 거듭 묻는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필요한 부품이 결코 적지 않은 것처럼, 내가 나이기 위해서는 놀라울 만큼 많은 것이 필요해. 다른 사람과 나를 구별하는 얼굴, 의식하지 않는 목소리, 잠에서 깨어 바라보는 손, 어린 시절의 기억, 미래에 대한 예감. 그것만이 아니야. 내 전뇌가 접근할 수 있는 방대한 정보와 네트워크의 확장. 그 모든 것이 나의 일부이며, 나라는 의식 자체를 낳고, 동시에 나를 어떤 한계 안에 계속 묶어 두지.”
이 말이 보여 주는 것은 자기가 어떤 최소 단위가 아니라, 놀라울 만큼 많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녀에게 ‘자기’는 신체, 기억, 정보, 환경이라는 요소들이 얽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요소들은 자기를 형성하는 동시에 자기를 통제하는 작용도 한다. 이런 자기관에서 영혼은 자기 안에 깃든 실체로 상정되지 않는다. 영혼이라는 말을 쓴다면, 이토록 많은 조건으로 성립하면서도 여전히 ‘나’라고 느껴지는 그 느낌 자체를 가리킬 뿐이다.
실제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불안을 말한다.
“나처럼 완전히 의체화된 사이보그라면 누구나 생각해. (중략) ‘지금의 나는 전뇌와 의체로 구성된 모의 인격이 아닐까.’ (중략) 만약 전뇌 자체가 고스트를 만들어 내고 영혼을 품을 수 있다면, 그때는 무엇을 근거로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해?”
여기서 질문하는 것은 자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가 아니다. 설령 모의 인격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부정할 근거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전뇌가 고스트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영혼은 더 이상 인간 고유의 증명이 아니다. 그때 ‘자신을 믿을 근거’는 내면에서도 신체에서도 찾을 수 없다. 영혼이라는 말은 인간이 인간임을 보장하는 구성 요소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쿠사나기 모토코는 자기를 찾고 있다. 자신을 인식하려면 누군가에게 관측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에게만 일어나는 일일까.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우리는 늘 어떻게 자기를 증명해 왔는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 자신이라는 확신은 무엇을 근거로 말할 수 있는가. 우리 역시 그녀처럼 이름과 역할, 평가와 기록을 통해서만 자신이 ‘여기에 있다’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자기는 내면에 감춰진 무언가가 아니라, 늘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잠정적으로 성립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쿠사나기 모토코의 불안은 극단적인 기술 사회의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지금까지 암묵적으로 지나쳐 온 자기의 불안정성이 드러났을 뿐이다.
관측되는 자기가 전제가 될 때, 인간은 더 이상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는 듯 보인다. 자신이 누구인지 보여 주는 정보는 이미 외부에 있으며 평가되고 관리된다. 그런 조건에서 ‘내가 그러고 싶어서’라는 이유는 근거로 삼기에 너무나 취약하다.
그런데도 쿠사나기 모토코는 자신이 진짜인지 확인할 수 없는 채로 나아갈 방향을 결정할 수밖에 없다. 그 선택은 ‘이것이 옳다’는 확신이 없음을 아는 상태에서 시작된다.
중요한 것은 이 선택이 착각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기가 관측되고 사실로서 남김없이 기술되어도,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선택을 포함해 여전히 결단한다. 주체란 확실한 자기를 소유한 존재를 뜻하지 않는다.
쿠사나기 모토코가 바토와 대화하는 장면에는 고린도전서 13장 11절의 인용이 나온다.
“바토, 언젠가 바다 위에서 들었던 목소리 기억해? 그 말 앞에는 이런 구절이 있어. ‘어릴 때에는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어린아이처럼 논했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 여기에는 ‘인형사’라고 불리던 프로그램도, 소령이라고 불리던 여자도 없어.”
일본어 성경 신공동역에서는 다음과 같이 옮긴다.
“나는 어린아이였을 때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어린아이처럼 숙고했다. 그러나 어른이 되었을 때에는 어린아이의 일을 그만두었다.” (고린도전서 13:11)
여기서 말하는 것은 성장이나 성숙이 아니다. 자기를 지탱하던 가치 기준 자체가 더 높은 존재와의 접촉을 통해 무효화되는 경험이다. 신공동역을 보면 이해하기 쉬운데, 완전한 신을 만났을 때 지금까지의 가치관이 모두 쓸모없어진다는 뜻이다. 자신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와 접촉하면, 지금까지 길러 온 가치관과 편견이 전부 뒤집히고 새로운 자기가 태어난다. 지금까지 보아 온 풍경과는 다른 새로운 단계로 나아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영혼이란 무엇이었는가. 자기란 무엇이었는가. 쿠사나기 모토코와 우리의 구별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기 안에 깃든 본질도, 정보화에 저항하는 신비로운 핵도 아니었다. 자기가 끝없이 설명 가능해졌음에도 여전히 ‘선택하고 마는’, ‘떠맡고 마는’ 주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리키기 위한 말이 아니었을까.
쿠사나기 모토코와 우리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도 확실한 자기를 갖지 못한 채 이름과 기록을 통해 근거 없는 선택을 하며 날마다 살아간다. 그런데도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영혼이라는 말이 사라지지 않는 까닭은, 그런 삶의 방식이 착각이 아니라고 어딘가에서 믿고 말기 때문이다. 또는 ‘자기’를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인정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생물학적인 본래의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